“플라시보(placebo) 효과는 기분 탓일 뿐이다.”
한때 의학계에서는 이런 시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들은 플라시보 효과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뇌와 신경계가 실제로 반응하는 생물학적 현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 연구들은 플라시보가 통증 회로와 면역 반응, 심지어 약물과 유사한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플라시보 효과는 실제 약효가 없는 약이나 처치를 받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때 증상이 완화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부작용을 예상해 실제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 경우를 노시보(nocebo) 효과라고 부른다.
플라시보 연구의 전환점은 이탈리아 신경과학자 파브리치오 베네데티 연구팀의 실험이다. 1999년 발표한 논문 ‘플라시보 진통 효과에 대한 신경약리학적 분석(Neuropharmacological Dissection of Placebo Analgesia: Expectation-Activated Opioid Systems Versus Conditioning-Activated Specific Subsystems)’에서 플라시보 효과가 뇌의 오피오이드 시스템과 직접 연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파브리치오 베네데티 연구팀은 2001년 낸 실험 보고서 ‘플라시보 효과의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Neurobiological Mechanisms of the Placebo Effect)’에서 인식 자체가 뇌의 통증 처리 과정을 변화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실험에서 같은 약물이라도 의사가 공개적으로 투여할 때와 몰래 투여할 때 효과 차이가 발생했는데, 기대감 자체가 약효 일부를 증폭시킨다는 해석이 나왔다.
플라시보 효과는 뇌 영상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관찰됐다. 미국 신경과학자 토르 웨거 박사 연구팀은 플라시보 효과가 가져오는 통증의 예측 및 경감 작용을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 기기로 살핀 실험 결과를 2005년 발표했다. 연구팀은 플라시보 약물 투여 후 뇌 전전두엽과 대상피질, 중뇌 회로가 실제로 활성화하는 상황을 확인했다. 이는 기대와 믿음이 뇌의 통증 억제 네트워크를 실제로 작동시킨다는 증거로 평가됐다.
최근에는 플라시보 효과가 뇌의 하향식 제어 시스템과 깊게 연결됐다는 사실이 쥐 실험으로 밝혀졌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UCSD) 연구팀은 지난달 16일 낸 실험 보고서 ‘통증 조절 시스템의 하향식 제어(Top-down control of the descending pain modulatory system drives multimodal placebo analgesia)’에서 플라시보 효과를 만드는 구체적인 신경 회로를 제시했다.
연구팀은 통증을 동반할 정도의 온도를 유지한 작은 챔버에 쥐들을 놓고 실험했다. 쥐를 챔버에 넣기 전 모르핀을 투여하기를 며칠 반복한 뒤, 모르핀 대신 생리식염수를 투여해도 쥐는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이 과정의 뇌 활동을 관찰한 연구팀은 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진통 물질의 신호 경로를 특정했다. 쥐의 대뇌피질과 예측·평가·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뇌 외층을 분석한 결과, 내측 전두전피질과 전대상피질의 고차원 영역이 활동했다.
내측 전두전피질은 의사결정과 미래 예측을 담당하며, 전대상피질은 통증의 인지와 감정 처리에 깊이 관여한다. 이 두 영역은 뇌간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복외측 중뇌수도 주변 회백질(vlPAG)에 활발하게 신호를 보냈다. vlPAG는 통증 신호를 조절하는 중요한 허브로, 뇌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진통 물질(내인성 오피오이드 펩타이드)의 방출을 조절한다.
이번 연구는 플라시보 효과가 단순한 심리 현상을 넘어, 뇌가 통증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연구를 주도한 줄리아 리브리치 박사는 “기대와 학습이 실제 신경회로를 통해 통증 억제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플라시보 효과는 통증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 관찰된다. 우울증 치료, 파킨슨병, 과민성대장증후군, 수면장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환자의 기대감이 실제 생리 반응에 영향을 준다는 결과를 반복적으로 보고해 왔다. 일부 파킨슨병 연구에서는 플라시보 투여만으로 도파민 분비 증가가 확인됐다.
물론 플라시보 효과는 암이나 감염병처럼 직접적인 병리 원인이 명확한 질환에서는 한계가 분명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플라시보가 더 이상 가짜 치료에 머물지 않으며, 인간의 뇌가 치료 환경과 기대를 활용해 증상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응용한 치료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이윤서 기자 lys@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