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얼어붙은 시신들. 안쪽으로부터 찢긴 채 널부러진 텐트. 17cm나 깨진 두개골과 안구가 뽑혀나간 얼굴. 1959년 러시아 우랄산맥 오토르덴 산에서 벌어진 일명 '디아틀로프 사건'의 진실이 61년 만에 밝혀질 수 있을까.  

■디아틀로프 사건이란

발견된 시신과 60년 넘게 이어진 수사 <사진-영화 '디아틀로프' 스틸>

1959년 2월, 구소련 우랄종합기술연구소 탐사대 10명이 오토르덴 산을 오르다 실종, 9명이 사망한 채 발견된 미제사건이다. 한 명은 산행 직전 포기 의사를 밝히면서 목숨을 건졌다. 당시 무전을 분석한 결과 산을 오르던 대원들은 1959년 2월 1일에서 2월 2일로 넘어가던 날 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고르 알렉세예비치 디아틀로프(당시 23세. 사건 이름은 이 사람을 땄다)를 대장으로 하는 등반대 9명은 1959년 1월 27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제이(Vizhai) 마을에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유리 유린이라는 대원은 두통이 극심해 캠프에 남았다. 워낙 산을 잘 아는 등반대 9명은 계획에 따라 순조롭게 산을 올랐다.

2월 1일 눈이 심하게 오자 디아틀로프 대장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다행히 체력도 남고 부상자도 없으며 물자도 넉넉해 콜라트 시쿨(Kholat Syakhl) 산 어딘가에 임시 캠프를 마련하고 휴식을 취했다. 걱정이 된 유리 유린이 무전을 치자 디아틀로프 대장은 "길을 잠시 잘못 접어들었을 뿐이다. 캠프를 치고 쉬는 중"이라고 답했다. 유리 유린은 안심했지만 이것이 살아있는 대장과는 마지막 무전이 되고 말았다.

등반대는 원래 2월 12일 임무를 마치고 비제이 마을로 돌아오기로 돼 있었지만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귀환하지 않았다. 2월 20일부터 수색이 시작됐고 사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정부가 인력을 투입하면서 대규모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실종자가 발견된 것은 2월 26일이다. 콜라트 시쿨 산의 임시캠프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5구를 수습했다. 악천후 탓에 수습이 계속 미뤄지다 1959년 5월 4일 나머지 시신 4구를 발견했다.  

디아틀로프 사건이 미스터리인 이유는 시신들의 상태, 캠프에 남겨진 의문투성이 잔해들 때문이다. 먼저 발견된 시신 5구는 한겨울에도 속옷만 입었고 일부는 신발도 벗어던진 상태였다. 얼굴은 극도의 공포로 가득했다. 텐트는 안쪽에서 심하게 찢긴 것으로 보였다. 옷가지에선 강한 방사능이 검출됐고 주변 나무가 불탄 점도 어색했다. 널린 잔해들로 봐선 대원들이 뭔가에 급히 쫓긴 분위기였다.

나중에 발견되 시신 4구의 상태는 더 안 좋았다.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시신, 혀가 잘리거나 안구가 없는 시신 등 훼손이 아주 심했다. 골절상의 정도로 미뤄 교통사고에 필적하는 충격을 받은 것으로 추측됐다. 러시아 정부는 눈사태에 의한 조난사고라고 발표했지만 유족은 믿지 않았다. 대원들이 사망한 산 이름이 만시어(우그리아 어족의 우그리아 어군 언어)로 '죽음의 산'인 사실은 대중의 호기심을 키웠다. 2013년엔 '디아틀로프'라는 영화까지 제작됐다. 

■디아틀로프 미스터리, 풀리나

밝게 웃는 '디아틀로프 사건' 희생자들. 사진 속 인물들은 영화배우들인데, 실제 인물들이 남긴 사진을 봐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사진=영화 '디아틀로프' 스틸>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60여년, 마침내 그 지독한 미스터리가 풀렸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간 대원들의 사망을 놓고 외계인 침입, KGB에 의한 살해, 핵폭탄 실험 등 갖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결론은 순식간에 벌어진 엄청난 추위와 눈사태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결론을 낸 건 러시아검찰청 우랄연방지구 차장검사 안드레이 쿠티야코프다. 디아틀로프 사건은 워낙 사망자도 많고 의문투성이며, 대중의 관심도 크고 진상규명을 원하는 유족 의지가 강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60년이나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다양한 조사를 진행해 왔다. 안드레이 차장검사도 오랜 세월 이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드레이에 따르면, 대원들의 직접적 사인은 저체온증과 압사다. 눈이 덮치면서 가해진 엄청난 압력 때문에 시신 일부가 극심하게 훼손됐다고 안드레이 차장검사는 분석했다. 진상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일행은 눈사태를 직감하고 황급히 텐트로부터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부 대원이 텐트를 찢었을 거다. 서둘러 자연적 방파제 역할을 하는 산등성이 안쪽으로 피난한 것으로 보인다. 베테랑인 디아틀로프 대장의 판단은 옳았지만 당시 시계가 16m에 불과한 게 문제였다. 다시 돌아가려고 보니 텐트를 찾을 수 없었을 거다."

안드레이 차장검사의 추측이 맞다면, 이후 대원들은 급히 챙겨 나온 물자로 불을 피웠다. 하지만 극한의 추위 속에 불은 1시간도 못 가 꺼졌고, 이 즈음 2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다급해진 대원들은 두 조로 나눠 텐트를 찾아나섰다.

<사진=영화 '디아틀로프' 스틸>

디아틀로프 대장이 이끄는 조는 정확하게 텐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눈바람에 휩쓸리고 말았다. 당시 추정 기온은 영하 40~45도. 극심한 체온저하로 대장과 대원들은 텐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두 얼어죽었다. 

그럼에도 시신들이 속옷차림이었던 것은 '역설적 탈의(paradoxical undressing)'라고 안드레이 차장검사는 추측했다. 역설적 탈의는 조난 등으로 극한의 추위에 노출된 사람이 오히려 덥다고 느끼는 일종의 착란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조의 시신들은 왜 심하게 훼손됐을까. 알렉산드르 졸로타료프(당시 37세)라는 대원이 이끌던 이 조의 상황을 안드레이 차장검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들은 움직이기보다 어떻게든 눈 속에서 추위를 견뎌내려 했을 거다. 다만 운 나쁘게 엄청난 눈사태가 발생했고 피하지도 못하고 파묻히고 말았다. 시신 일부에서 관찰되는 심각한 골절은 눈의 압력 때문이다. 혀는 충격에 입을 다물며 잘린 것으로 보인다. 안구가 빠져나간 것도 압력 탓이다. 테니스공 한쪽에 압력을 가하면 반대편이 터져나간다. 즉 뒤통수에 타격을 입어 안구를 잃은 거다."

차장검사는 대원들이 국가를 위한 탐사에 나섰다가 모두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으며, 안타깝게도 자연의 변덕 앞에 살아남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리라고 애도했다. 러시아는 이 결론을 끝으로 디아틀로프 사건을 사실상 종료할 방침이다. 다만 유족 측 변호사들은 절대 납득하지 못한다며 재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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