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이름이 같은 스파이가 1960년대 암약한 사실이 밝혀졌다. 극중 본드와 활약상이 비슷한 스파이의 사연은 전에도 전해졌으나, 이름까지 같은 첩보원의 존재가 드러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폴란드국가기록원(IPN)이 최근 공개한 ‘007’ 관련 기밀문서에 따르면, MI6로 알려진 영국 비밀정보국(Secret Intelligence Service, SIS)은 지난 1964년 2월 제임스 알버트 본드(James Albert Bond)라는 공작원을 폴란드에 파견했다.

‘007’의 제임스 본드와 이름 철자까지 같은 그는 아내와 6세 아들과 함께 영국 데번셔로부터 폴란드 바르샤바의 영국대사관에 부임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대사의 비서이자 서류를 다루는 평범한 직원이었는데, SIS는 그에게 현지 시설들을 감시하는 비밀 임무를 맡겼다. 

제임스 알버트 본드 <사진=폴란드국가기록원 공식홈페이지>

당시 공산체제였던 폴란드는 서방세력이 예의주시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기록을 보면, 본드는 재임기간 현지 SIS 직원들과 여러 차례 폴란드 북동부로 출장을 다녀왔다. IPN은 그가 폴란드 군 관련 시설의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60년대 폴란드는 영국대사관 외교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제임스 본드 역시 폴란드 방첩부대의 감시하에 있었다. 방첩부대원들은 그의 사소한 일상까지 관찰했는데, 여성에 대한 언행이나 성향도 그 중 하나였다.

제임스 본드는 폴란드 부임 10개월도 지나지 않아 가족을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그 역시 몇 주 뒤 바르샤바를 떠나 데번셔로 향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IPN은 “실존인물은 영화 속 본드와 달리 평범한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매력만점 인물로 묘사되는 제임스 본드 <사진=영화 '007 살인번호' 스틸>

우리가 잘 아는 ‘007’ 속 제임스 본드는 아주 대담하고 유능하며 화려한 스파이다. 몸싸움은 물론 각종 비밀무기에 능하고 본드카에 오르면 가히 천하무적. 그 뿐인가. 미인들이 줄줄이 넘어갈 정도로 마성과 매력이 철철 흐르는 상남자로 그려진다.

이와 달리 실제 제임스 본드는 폴란드군의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하급 첩보원이었다. 영국은 공산주의 세력이 서유럽으로 침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실적 위협이던 폴란드를 오랜 기간 감시해 왔다. 현지에 파견된 SIS 요원들은 정기적으로 교외에 나가 사진을 찍고 지도를 만들거나 군 훈련장 정보를 수집했다.

IPN은 “당시 폴란드 주재 영국 첩보원들은 군의 동향에 관심을 가졌지만 방첩부대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면서 정보원에 의존하게 됐다”며 “본드 같은 인물들의 교외 출장도 감시가 붙었고, 점점 진지한 간첩활동보다 레저 양상을 띠게 됐다”고 설명했다.

초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 지난 10월 별세했다. <사진=영화 '007 살인번호' 스틸>

흥미로운 점은 당시 폴란드 첩보기관이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 본드가 암약하던 1964년은 제임스 본드가 첫 등장한 이언 플레밍의 1953년 소설 '카지노 로열' 출간 10년이 넘은 때였다. 이언 플레밍 생전에 만들어진 숀 코네리 주연의 '007' 시리즈 첫 작품 '007 살인번호(Dr. No)'가 1962년 개봉했으니 폴란드 첩보원들이 제임스 본드에 익숙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IPN은 “진짜 제임스 본드가 폴란드에 왔으니 당연히 주목을 받았을 것”이라며 “방첩부대나 내무부가 SIS의 계략이라고 의심하면서 감시를 붙이지 않을 수는 없던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영국이 하급 스파이를 바르샤바에 파견한 것은 당시 SIS 국장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라며 “일부러 ‘007’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공작원을 배치해 폴란드 방첩부대의 주의를 혼란시킬 목적이 다분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서지우 기자 zeewoo@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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