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많은 전염병은 인류를 사지로 몰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는 지혜도 길러줬다. 사람들은 무서운 질병에 대비하는 법을 세웠고 발병 시 방역수칙도 알아냈다. 우리 몸도 변화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못하는 사이, 유전자들은 특정 전염병을 이기기 위해 오랜 세월 면역을 길러왔다.

이번에 독일 생물학자들은 그 유명한 페스트균이 인간 면역유전자를 진화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공동묘지에 오래 잠들어 있던 시신의 DNA를 분석한 끝에 밝혀졌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페스트 대유행 당시 숨져 독일 엘방엔 지역 공동묘지에 매장된 시신 일부를 자손들 동의를 얻어 조사했다. 내이골(inner ear bones)을 통해 DNA를 채취한 연구팀은 현재 엘방엔 주민 50명의 DNA와 면밀히 비교했다.

흑사병 대유행을 배경으로 한 영화 '블랙 데스' <사진=영화 '블랙 데스' 스틸>

연구팀은 두 DNA 사이에서 면역 관련 유전자의 변화를 확인했다. 면역 관련 유전자 488개 중에서 페스트균에 의해 몇 가지 변이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됐다. 정확하게는 인간 면역에 관여하는 피콜린(ficolin) 및 NLRP14 같은 단백질 변이에 관련된 대립유전자빈도가 달라졌다.

대립유전자빈도란 어떤 집단에서 같은 유전자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대립유전자 사이의 구성 비율을 말한다. 페스트균은 틀림없이 수많은 엘방엔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겠지만 한편으론 면역 관련 유전자 형성에도 기여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엘방엔에 국한되지 않았을 거라는 게 연구팀 분석이다.

연구팀 관계자는 “병원균이나 이로 인한 감염증은 인류에 지속적 선택압(유리한 개체군의 선택적 증식을 재촉하는 다양한 요인)을 가해왔다”며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이런 자연선택의 원리로 페스트균이 면역 관련 유전자에 영향을 줘 사람들 면역이 강화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페스트로 쑥대밭이 된 유럽 <사진=네덜란드 작가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페스트는 림프절에 대한 출혈성·화농성 염증이 급격하게 번지는 전염병이다. 피부가 검붉게 변해 흑사병으로도 불렀다. 페스트균을 가진 벼룩에 물린 집쥐 등으로부터 유래한 병으로 수차례 유행하며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다. 14세기 일어난 대유행 당시에만 세계 인구 4억5000만명 중 20%가 넘는 1억명이 숨졌다. 이번에 연구가 이뤄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오랜 세월 흑사병에 시달렸던 지역이다.

연구팀 관계자는 “이번 실험결과는 무서운 감염증이 사람의 진화적 적응에 관계한다는 걸 보여준다”며 “페스트는 물론 사스나 메르스 같은 팬데믹은 인류 역사상 늘 반복됐지만 반드시 생존자를 남겼다. 코로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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