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부리에 담긴 진화의 비밀을 풀려던 찰스 다윈의 노력이 후대에 결실을 맺었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팀은 비둘기의 부리 길이에 관여하는 유전자 변이가 인간에게서 드물게 관찰되는 희귀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
미국 유타대학교 연구팀은 부리가 짧은 비둘기와 일반적인 부리를 가진 비둘기를 교배, 새끼들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두개·안면 관련 희귀질환에 걸린 사람들에서 관찰되는 ROR2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다고 23일 발표했다.
연구팀은 부리 길이가 다른 비둘기들을 교배, 새끼의 게놈을 들여다보면 부리 길이에 관여하는 공통된 유전자 변이를 관찰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연구팀은 부리가 짧은 올드 저먼 아울(Old German owl) 종과 일반적인 부리를 가진 레이싱 호머(Racing Homer) 종을 실험에 동원했다.
비둘기 두 종을 교배해 얻은 새끼 중 부리가 짧은 개체의 게놈 지도를 분석한 연구팀은 ROR2 변이를 관찰했다. 이는 짧은 부리를 가진 어미 비둘기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됐다. ROR2 유전자는 사람에게도 변이를 일으키는데, 희귀병으로 분류되는 로비노-실버만-스미스 증후군(Robinow-Silverman-Smith syndrome)에 깊이 관여한다.
로비노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이마가 넓고 툭 튀어나오거나 코와 입이 짧은 외형적 특징을 보인다. 실험 관계자는 “ROR2 시그널 전달 경로는 척추동물의 두개 안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이미 입증됐다”며 “발생학적 관점에서 볼 때 로비노 증후군을 가진 비둘기는 대체로 부리가 짧았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부리가 짧은 비둘기들은 성염색체 일부에 같은 변이를 갖고 있었다”며 “실험에 동원되지 않은 비둘기 89종의 게놈을 비교했더니 부리가 짧은 종은 하나같이 ROR2 유전자를 포함한 게놈 영역에 같은 DNA 배열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비둘기 일부의 부리가 짧아지는 것은 변이에 따라 ROR2 단백질의 접힘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연구팀은 향후 이 유전자 변이가 두개·안면 형성 및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들여다볼 예정이다.
비둘기는 찰스 다윈이 그 유명한 진화론을 떠올리게 한 단초가 됐다. 다윈은 비둘기들의 서로 다른 부리가 자연 선택의 미스터리를 풀 열쇠라고 믿었다. 때문에 다윈은 1855년 집에 거대한 사육장을 만들고 많은 비둘기를 들여와 다양한 종을 교배하면서 진화의 수수께끼를 풀려 노력했다. 이런 그의 탐구는 ‘종의 기원’이라는 값진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도시에서 일반적으로 접하는 비둘기는 바위비둘기(Columba livia)를 말한다. 고대 인류가 고기를 얻을 목적으로 가금화한 비둘기는 나중에 전령용, 경주용 등 다양한 용도로 개량되면서 현재 350종 이상이 지구상에 서식한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