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가 가루가 되고 있어.”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은 사회학적, 그리고 병리학적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전형적으로 범죄자에게서 관찰된다. 개중에는 인육을 먹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신 엽기적인 인물이 있다. 물론 흡혈을 카니발리즘과 연결하기에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워낙 수법이 극적이라 그의 사후 40년이 되도록 악명이 여전하다.

197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리처드 트렌튼 체이스(1950~1980)는 자신의 핏속에 몹쓸 독이 흐른다고 믿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작은 요구르트 병에 희생자의 피를 담아 마셨다고 해서 ‘새크라멘토의 흡혈귀’라 불렸다.

리처드 트렌튼 체이스 다큐멘터리 중에서 <사진=유튜브>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의 중산층 출신인 리처드는 말 잘 듣는 평범한 아이였다. 정신적 문제가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크게 다투면서 12세 무렵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고교에 진학 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2학년 때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나중에 약물에도 손을 댔다. 여자친구를 몇 명 사귀었으나 발기부전이 있었던 그는 늘 자괴감에 빠져 살았다.

1973년 리처드는 결국 중증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고, 이때부터 부모로부터 방치되다시피 했다. 1976년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자신이 중독됐고, 피가 가루가 된다며 혈액보충을 요구했다. 병원이 거부하자 직접 동물을 물어뜯어 피를 마셨다. 주위의 환자들은 그를 ‘드라큘라’라며 두려워했다.

리처드는 이후 병원으로부터 약을 계속 복용한다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하지만 그의 모친은 약을 투여하지 않았다. 모친이 얻어준 아파트에서 홀로 살게 된 리처드는 개나 고양이를 죽여 내장을 믹서에 갈아 콜라와 섞어 마셨다.

동물의 피에 싫증을 느낀 리처드는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1978년 1월 23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가정집의 임산부를 살해, 피를 빼 요구르트 병에 넣어 마셨다. 그해 1월 27일에는 한 가정집에 침입, 가족 등 무려 4명을 살해, 피를 퍼마셨다. 다음날 목격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에 체포될 당시 그의 달력에는 40일 넘는 살인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979년, 사형을 선고 받은 그는 FBI 수사관이자 저서 ‘FBI 심리분석관’으로 유명한 로버트 K. 레슬러와 면담했다. 1978년 1월 23일 사건을 접한 뒤 수사에 착수, 리처드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로버트는 그가 책임무능력자, 즉 법률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인물로 간주했으나, 항소심에서 기각됐다.

결국 사형수로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리처드는 1980년 12월 26일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털어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리처드가 죽기 전 그와 면담한 로버트는 그가 전형적인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며 책에 이렇게 적었다.

“리처드는 자신이 유태인이며, 나치의 박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UFO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고, 살인을 해 피를 마시라고 종용했다고도 했다. 리처드는 놀라운 말을 했다. 자신이 피를 마시는 결정적 이유가 ‘비누접시 중독’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비누접시를 갖고 있는데, 비누를 들었을 때 마른 상태면 문제가 없지만 젖어서 끈적거리면 피가 가루가 된다고 했다.” <로버트 K. 레슬러 ‘FBI 심리분석관’ 중에서>

리처드가 손쉽게 붙잡힌 내면에서 범죄의 두 가지 측면을 관찰할 수 있다. 로버트 K. 레슬러가 저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체계적 살인과 비체계적 살인이 그것이다. 전자는 범행 전은 물론 뒤처리까지 치밀하게 준비하는 반면, 후자는 이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당연히 범죄 현장은 고스란히 남겨지고, 수사관들은 용의자를 손쉽게 압축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레슬러는 “범죄심리학적으로 보면, 비체계적 살인은 정신병을 포함한 여러 병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말을 남겼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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