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시편109편 5~6절>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시편109편 9~10절>

구약성서 시편 109편의 저자 다윗은 위와 같은 피맺힌 저주를 사울과 그 무리에 퍼부었다. 다윗은 원수들이 다시는 번성하지 못하도록 신의 무서운 징벌을 간구한다. 구절 하나하나 서린 원한이 원수는 물론 그 자손의 멸망까지 바라는 점이 아주 섬뜩하다. 

저주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사무친 한을 풀기 위해 원수를 저주하고 살을 날렸다. 원한은 대개 대를 이어 계속되며, 저주를 풀기 전까지 자손까지 고통 받는 이야기들은 국경을 넘어 전설로 남아있다. 유럽의 오래된 고문서에는 왕족에 대한 천민들의 저주가 등장하고, 저주를 풀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도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펠라의 저주 평판(Pella Curse Tablet)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사진=pixabay>

1986년 고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 발굴조사에서 저주의 글귀가 빼곡한 두루마리가 출토됐다. 고고학자들은 문제의 두루마리가 기원전 375~350년 사이 도리아어(스파르타 방언의 기원)로 작성된 것으로 분석했다.

해당 저주를 기록한 인물은 여성으로, 이름은 다기나(Dagina)로 추정됐다. 문장을 해석한 결과, 이 여성은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인연을 택한 연인을 향해 무서운 저주를 내렸다.

다기나는 옛 연인이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한맺힌 문장의 끝에는 "오직 저와 사랑을 이룰 수 있기를"이란 마법 주문도 따라붙었다. 고고학자들은 고대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사용되던 기품 넘치는 도리아어와 달리 저속한 표현이 섞인 점에서 다기나가 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마케도니아에서는 신에게 뭔가 바라거나 특정 인물을 저주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저주로 빼곡한 마케도니아의 두루마리들은 지금까지 1600여점 발견됐는데, 이 펠라의 두루마리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카지미에슈 왕의 저주(King Kazimierz's Curse)
1973년, 고고학자들이 매달린 폴란드 왕 카지미에슈 4세(Kazimierz IV Jagiellończyk)의 무덤이 마침내 출토됐다. 하지만 발굴의 기쁨도 잠시, 참가한 학자 중 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으면서 학계가 술렁였다.

심지어 살아남은 학자들 중 일부가 사건 몇 년 만에 암 등 중병으로 쓰러졌다. 결국 카지미에슈 4세의 유해를 접한 고고학자 15명이 왕의 무덤 출토 수 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됐다.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 신문들은 고고학자들이 카지미에슈의 저주에 연달아 사망했다고 떠들어댔다. '카지미에슈 왕의 저주'는 바다 건너 미국과 아시아에도 악명을 떨쳤다. 

1427년 탄생, 20세가 되던 1447년 재위에 오른 카지미에슈 4세는 오스트리아 빈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로마 가톨릭교회 튜턴기사단을 쳐부수고 포메라니아를 탈환, 유럽의 한 축으로서 폴란드 왕조를 일궜다. 

1492년 카지미에슈 왕이 죽자, 악천후 탓에 시신이 단시간에 부패하고 말았다. 왕실은 카지미에슈 왕의 시신을 황급히 관에 넣고 밀봉했는데, 뜻밖에도 이 안에서 병원균 폭탄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즉, 고고학자들을 차례로 저승으로 보낸 '카지미에슈 왕의 저주'의 정체는 아스페르길루스 플라부스(Aspergillus flavus, 아스페르질루스 플라부스)라는 진균이었다. 주로 썩은 옥수수나 땅콩, 곡류 따위에서 발견되며 시신이 부패할 때도 생겨난다. 이 몹쓸 진균은 아플라톡신이라는 독소를 생성하는데, 사람이나 동물에게 급성 또는 만성 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저주' 역시 아스페르길루스 플라부스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영면에 든 위대한 왕의 무덤을 파헤친 데 대한 왕가의 진노가 고고학자들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오래된 주장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자크 드 몰레의 저주(Jacques De Molay's Curse)

템플기사단을 상징화한 이미지 <사진=pixabay>

13세기 템플기사단(the Order of Templars, 성전기사단)은 유럽 최강의 조직이었다. 십자군전쟁 당시 각지를 돌며 영토를 획득한 이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교황의 이름으로 기부를 받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초기의 은행업(대출)을 영위했다. 이들이 솔로몬왕의 잃어버린 보물을 발견하며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자크 드 몰레가 템플기사단의 마지막 총장에 오른 것은 중동 원정 이후인 1292년이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잦은 원정 등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템플기사단에 손을 여러 차례 벌렸다. 애초에 돈을 갚을 생각이 없던 필리프 4세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한방에 정리하기 위해 교황과 짜고 일을 꾸미기에 이른다.

필리프 4세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자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템플기사단은 반기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고위 간부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 결혼 전, 또는 아내의 허락을 받은 기혼자 귀족으로 구성된 템플기사단은 입회식이 비밀스러워 여러 소문이 떠돌았는데, 필리프 4세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궁지에 몰린 템플기사단은 1307년 필리프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협공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바로 총장인 자크 드 몰레가 치명적인 누명을 쓰고 붙잡히고 말았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7년간 유폐된 몰레는 1314년 3월 18일 노트르담 대성당 앞 센 강 인근에 세워진 화형대에 올랐다.

사무치게 억울했던 자크 드 몰레는 화형대에서 이를 악물고 다음과 같은 저주를 퍼부었다.

"필리프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년 안에 죽으리라. 필리프 왕가의 대 또한 머지않아 끊어지리라!“

클레멘스 교황에 의해 템플기사단이 해산된 지 2년 만에 자크 드 몰레도 죽음을 맞았지만 피맺힌 저주는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그가 사망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인 1314년 4월 20일 클레멘스 교황이 급사했다. 필리프 4세 역시 뇌경색으로 고생하다 그해 11월 29일 숨이 끊어졌다. 더욱이 필리프 4세가 죽은 뒤 14년째 되는 1328년까지 그의 아들과 손자, 손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눈물을 쏟으며 화형대에서 외친 자크 드 몰레의 저주가 제대로 통한 셈이다. 


■성녀 안나의 저주 맺힌 우물(The Curse Of St. Anne’s Well)
2016년, 잉글랜드 북서부 도시 리버풀 인근에서 우물 하나가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이 우물이 널리 알려진 성녀 안나와 관련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녀 안나는 다윗의 후손으로 마리아의 친모이자 예수의 외할머니다. 안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 한나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 교회의 전승 속에 전해지는 인물 안나는 일반에서 사용하는 정경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리아의 어머니이자 '성녀'로 숭앙 받는 안나는 치유의 상징이기도 했다. 14세기 영국의 한 여인이 몹쓸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한 우물에서 목욕하고 나서 씻은 듯이 나았다. 이후 치유의 우물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우물을 찾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 1877년, 영국의 한 신문은 '성녀 안나의 우물'이 사실은 저주의 우물이라는 기사를 냈다. 이에 따르면, 1534년 영국의 한 성당에 피부병과 눈병을 낫게 하는 신비로운 우물이 있었는데, 바로 사람들이 찾던 '성녀 안나의 우물(St. Anne’s Well)'이었다.

문제는 당시 영국 왕이 헨리 8세였다는 사실이다. 1538년 수도원 해산령을 내린 헨리 8세는 전국의 수도원 토지와 재산들을 박탈, 국유화했다. 이 와중에 우물이 위치한 성당도 먹잇감이 됐다. 성당 인근의 땅을 소유했던 휴 다아시라는 인물은 소문의 우물을 손에 넣기 위해 토지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성당 신부가 목숨을 걸고 막았으나 헨리 8세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쳐들어와 성당과 우물을 점령해버렸다.

결국 신부는 사태의 발단이 된 휴 다아시를 저주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석 달도 안 돼 휴 다아시의 아들이 의문의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휴 다아시는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었고, 1년 뒤 성녀 안나의 우물 바닥에서는 머리가 깨진 그의 처참한 시신이 발견됐다. 


■요정의 분노(The Wrath Of The Fairies)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사진=pixabay>

아일랜드 전설에 따르면, 워터퍼드(아일랜드 먼스터주의 도시)의 명물 '페어리포트(fairyfort)'를 파괴한 자에게는 반드시 커다란 재앙이 닥친다.

철기시대 페어리포트는 고리 모양의 훌륭한 성채였다. 성곽 안쪽은 농장이 조성됐고 주위를 둘러싸는 둑이 동물이나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줬다. 이렇게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페어리포트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요정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됐다. 만일 누군가 이 아름다운 곳을 파괴한다면, 반드시 무시무시한 저주가 내리리라는 소문 역시 오랜 세월 계속됐다.

페어리포트의 저주를 무시한 것이 미국 제약회사 웨스트 파마슈티컬 서비시즈(West Pharmaceutical Services)다. 이 회사는 아일랜드 페어리포트에 공장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직원 모집에 나섰다. 하지만 저주를 믿는 현지인들이 일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웨스트 파마슈티컬 서비시즈는 아일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웃돈을 주고 건설인부들을 고용했다. 

뒤늦게 페어리포트의 저주를 알게 된 회사는 공장 건설에 앞서 성난 민심을 달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분노한 현지인들은 언제 어떻게 제약회사 공장에 저주가 내릴 지 알 수 없다며 취업을 거부했다.


■도굴에 대비한 석관의 저주(The Curse Of The Sarcophagus)
1923년 이뤄진 고대 페니키아 도시 비블로스 발굴조사 중 아히람 왕(King Ahiram)의 저주받은 석관이 발견됐다.

당시 석관은 큰 비로 언덕이 무너져 묘역이 드러나면서 비교적 손쉽게 발굴됐다. 석회암으로 만든 석관은 기원전 1000년 무렵의 것으로 아히람 왕의 존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석관에 새겨진 글씨는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학자들은 석관 겉면에 글자를 새긴 인물이 바로 아히람 왕의 아들 이토바알(Ittobaal)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이토바알이 새긴 문장 중에는 도굴로부터 아히람 왕과 왕조를 지키려는 무시무시한 저주가 포함됐다. 이 문자들은 완성된 페니키아 알파벳의 가장 오래된 예로 여겨져 학술적 가치도 인정 받았다. 비블로스는 이집트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아히람 왕의 석관은 페니키아만의 고유 양식으로 만들어진 점도 특이하다.

현재까지 아히람 왕의 석관을 발굴한 고고학자 중 저주를 받은 인물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석관에 비록 저주의 글이 새겨졌지만, 큰 비로 묘역이 저절로 발굴된 덕에 피해자가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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