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이 오랜 세월 보관해온 고대 바빌로니아 점토판 속 형상이 사람이 아닌 유령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는 3500년 된 이 점토판이 인류가 최초로 영혼을 묘사한 작품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영국 고대 문헌 전문가 어빙 핀켈 박사(70)는 오는 11일 발간할 자신의 저서 ‘최초의 유령: 가장 오래된 유산(The First Ghosts: Most Ancient of Legacies)’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고대 중동 역사와 설형문자(쐐기문자) 전문가인 어빙 박사는 현재 대영박물관 중동 학예사로 일하고 있다. 박물관에 보관된 고대 바빌로니아 유물들을 연구해온 그는 3500년 전 것으로 확인된 점토판 속 인물이 유령일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박사가 주목한 점토판은 19세기 발굴됐으나 가치가 덜한 것으로 판단돼 대영박물관 보관소에 잠들어 있었다. 이 점토판은 여성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앞서 걷고, 그 뒤를 수염을 기른 남성이 따르는 상황을 담았다. 그간 학자들은 그림이 고대 바빌로니아인 둘을 담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빙 박사는 남성이 여성을 따라 명계, 즉 저승으로 향하는 유령이라고 분석했다.
어빙 박사는 “점토판 속 인물의 윤곽을 따라 흰 선을 그려 자세히 보면 남성이 쭉 뻗은 양팔은 밧줄에 묶여있다”며 “이 밧줄을 앞서 걷는 여성이 잡고 있는데, 이는 유령을 저승으로 다시 인도하는 일종의 엑소시즘(퇴마의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뒤따르는 남성의 얼굴에서는 비참함마저 느껴진다. 큰 키에 앙상한 몸, 텁수룩한 수염을 한 귀신이 집안을 서성거리면 당시 사람들도 소름이 끼쳤을 것”이라며 “점토판은 빛을 비춰봐야 유령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에 오래전 이를 입수한 박물관은 전시도 하지 않고 방치했다.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박사에 따르면 점토판은 정교한 그림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경고도 담고 있다. 어빙 박사는 “유령을 새긴 점토판 뒤편에는 완벽한 그림과 어울리는 품격 있는 문장이 들어가 있다”며 “이승을 헤매는 유령을 쫓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적혔는데,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문이 특히 흥미롭다”고 말했다.
기록에 따르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령이 이승에 나타나면 그 원인을 파악해 일종의 퇴마의식을 치렀다. 어빙 박사는 “점토판 그림의 경우 유령이 저승으로 돌아가도록 하려면 어떻게든 이승의 동반자가 필요했던 모양”이라며 “앞서 걷는 여성은 유령이 생전 함께 했던 연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사는 자신의 생각이 맞을 경우 이 점토판이 인류 최초의 유령화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3500년 전 만들어진 점토판보다 오래된 유령 그림을 소장한 기록이 일단 기네스북에 없기 때문이다. 박사는 “비록 점토판의 절반이 사라졌고 크기가 사람 손바닥 정도로 작지만 뒷면에 사람을 홀려 떨어지지 않는 유령에 대처하는 방법이 적혀있는 등 유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어빙 박사는 이 오래된 유령화를 대영박물관이 전시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유물들은 현대인과 조상들 사이의 거리를 한층 좁혀주는 역할을 한다”며 “현대인들이 유령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3500년 전 조상들에게도 영적 존재가 특별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