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스파냐)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비밀 편지가 500년 만에 해독됐다. 중세 최고의 권력자 카를 5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프랑스의 위협, 특히 암살을 몹시 두려워한 것으로 드러났다.
컴퓨터공학에 기반한 프랑스 리서치 집단 ‘LORIA’는 27일 공식 채널을 통해 카를 5세가 암호로 작성한 편지 해독 작업이 6개월 만에 마무리됐다고 발표했다.
10페이지에 달하는 이 편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이 한창이던 1547년 어느 날 카를 5세가 프랑스 대사에 은밀하게 보냈다. 프랑스 북부 낭시의 스타니슬라스 도서관에 오랜 세월 잠든 탓에 존재가 드러나지 않다가 2019년 세실 피에로라는 암호 학자가 발견하면서 해독 작업이 시작됐다.
세실 피에로는 암호 해독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동원했는데, 우주의 나이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LORIA’ 소속 전문가들과 공동 조사팀을 꾸린 그는 암호학, 역사학, 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카를 5세의 편지를 분석하는 한편,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썬(Python)’을 이용해 암호 해독을 시도했다.
약 6개월간 이어진 고된 작업 끝에 편지 한 장에 적힌 구절에서 대략적인 힌트가 나왔다. 조사팀은 해독에 성공한 문장 하나를 돌파구 삼아 카를 5세가 무려 120가지 기호를 사용해 암호 편지를 작성했음을 알아냈다.
분석 결과 편지는 프랑스의 공격을 우려하는 카를 5세의 절망적인 심경으로 가득했다. 편지 전체가 프랑수아 1세가 직접 파견한 암살자에 대한 두려움과 우울함으로 점철됐다.
학자들은 16세기 절대 세력을 가졌던 권력자의 편지 치고는 의외의 내용이라고 평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3대 수장이자 스페인 국왕, 신성 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는 40년에 걸친 치세 동안 서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을 지배한 거대 제국의 통솔자였다.
세실 피에로는 “카를 5세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권력자였지만 마냥 기세 등등한 것은 아니었다”며 “스페인에 맞선 숙적 프랑스와 전쟁은 그에게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카를 5세의 암호는 아랍어가 힌트가 된 것으로 보인다”며 “암호가 쉽게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무의미한 기호들을 무작위로 집어넣는 등 트릭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조사팀은 편지 속 문장들이 카를 5세와 숙적 프랑수아 1세의 관계, 나아가 스페인과 프랑스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544년 평화 협정을 맺은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의 관계가 1547년에 이르러 악화됐음을 보여주는 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라고 강조했다.
조사팀은 향후 카를 5세가 프랑스 대사와 주고받은 다른 편지들을 조사하면 스페인이 구상했던 세계 정복 전략의 전체 이미지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다.
서지우 기자 zeewoo@sputn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