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지는 겨울은 야생동물들이 동면을 취하는 시기다. 먹이가 부족한 시기 대사를 일부러 떨어뜨려 추운 겨울을 나는 자연의 신비인데, 동면 대신 뇌 크기를 직접 조절하는 신기한 동물도 있다.
주인공은 허항령첨서다. 일반에 다소 생소한 이름인데, 유라시안 피그미 뒤쥐(Eurasian pygmy shrew)라고도 부르는 땃쥐과 포유류다. 땃쥐는 자기 몸의 10%에 달하는 거대한 뇌를 가진 동물이다.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코끼리땃쥐는 형태학적으로는 쥐지만 유전자계통수로는 코끼리에 가깝다.
여러모로 신기한 땃쥐의 일종인 허항령첨서는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시베리아의 툰드라까지 유라시아 지역에 서식하며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음으로 의사소통한다.
몸집은 작아도 대사가 활발해 거미 등 곤충과 민달팽이, 지렁이 등을 먹어치우는 허항령첨서에게 겨울은 혹독한 시기다. 한겨울 대사를 극한까지 줄여 동면에 들어가거나 따뜻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다른 동물과 달리 허항령첨서는 뇌를 축소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
이 사실은 독일 막스플랑크 동물행동연구소가 지난 2017년 처음 알아냈다. 연구소는 허항령첨서가 추운 몇 달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뇌를 평소의 4분의 1까지 축소하는 것을 목격했다. 뇌 속의 물질들은 놀랍게도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거의 원래대로 재생됐다.
계절에 따라 동물의 뇌나 기타 기관이 축소·확장하는 것을 ‘데흐넬 현상’이라고 한다. 처음 발견한 폴란드 동물학자 아우구스트 데흐넬의 이름을 땄다. 동물은 기온이 떨어지면 칼로리를 많이 소비하는 조직의 부피를 줄일 수 있는데, 허항령첨서 외에 족제비나 두더지과 일부 종에서 두개골의 계절적 수축이 발견됐다.
학자들은 허항령첨서의 놀라운 뇌 축소를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이 동물이 쪼그라든 뇌를 어떻게 회복시키지 알아내면 인간의 다발성 경화증을 비롯해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등 신경변성질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물론 관련 연구가 쉽지는 않다. 아우구스트 데흐넬이 이 현상을 발견한 것은 1949년이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과학자가 거의 없었다. 허항령첨서가 좋은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5년 남짓이다.
게다가 허항령첨서는 너무 작고 평균수명이 1년 남짓으로 짧고 사육하기도 곤란하다. 독을 가진 몇 안 되는 포유류인 데다 연구를 위한 진정제 투약도 어려워 학자들로서는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윤서 기자 lys@sputn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