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사라진 뒤 지구에 새로운 문명을 일으킬 생물로 문어가 꼽혔다. 두족류인 문어는 뛰어난 지능과 공감 능력, 인내심을 가져 영장류에 버금가는 영리한 생물로 여겨져 왔다.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동물학자 앤드류 와이튼 교수 연구팀은 최근 조사 보고서를 내고 인류 멸망 후 지구에서 번창하는 생물은 문어일 가능성을 점쳤다.
지구상의 생물은 과거 5차 대멸종까지 겪었다. 학자들은 핵전쟁 위험 고조와 기후변화로 수많은 생물이 6차 대멸종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는데, 인류에 이어 문명을 일굴 생물에 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제기됐다.
앤드류 교수는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뿐이지만 문어는 매우 많은 종이 있고 심해에서 해변까지 다양한 곳에 서식한다"며 "어떤 개체군이나 종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종이 살아남아 서식지를 확장하고 진화 과정에서 분기해 연안부 등 다양한 서식지를 식민지로 만들 기회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양생물이 육상생물의 멸종을 틈타 적응하고 진화한 사례는 이미 많다. 인류도 공룡 멸종으로 대두된 포유류가 조상"이라며 "공룡이 사라지면서 작은 포유류 조상들이 기회를 잡은 것처럼 지금은 얌전히 살고 있는 다른 종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다는 시나리오는 공상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문어는 지능이 높은 동물로 조개껍데기나 코코넛 껍질에 은신하거나 도구를 소지하고 능숙하게 사용한다. 또한 문어는 퍼즐을 풀거나 병마개를 열 줄 알고 수조에서 탈출해 바다로 돌아가는 상상 이상의 영리함을 보여준다.
앤드류 교수는 "문어는 큰 뇌를 발달시킨 인류와 다른 방법으로 지능을 발달시켜 왔다. 문어의 지성은 주변 환경을 감지하는 다리 8개와 커다란 눈 2개에서 비롯된다"며 "문어의 다리가 반자율적으로 움직이면서 하나의 작업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라고 언급했다.
교수는 "문어는 척추가 없기 때문에 문명을 쌓는 장소는 지상이 아니라 바다가 될 가능성이 높다"며 "문어가 수중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손쉽게 얻는 에너지원이 필요하며, 연안의 문어는 밀물을 이용하게 될지 모른다. 심해 문어의 경우 열수분출공의 에너지를 이용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연구팀은 지능과 에너지를 손에 넣은 문어의 다음 과제는 사회성이라고 봤다. 문어는 기본적으로 무리를 짓지 않고 때로는 서로 잡아먹기 때문에 문어가 집단생활을 영위하려면 이 점을 극복해야 한다.
앤드류 교수는 "이런 습성 때문에 문어가 인간과 같은 사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며 "문어가 더 견고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 동료 사이의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추측했다.
그는 "문어의 사회적 습성은 과거 5000만 년에서 1억 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기에 가까운 장래에 바뀔 가능성도 낮다"면서도 "다만 문어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일부 종은 높은 사회성을 가졌고 10마리 이상 무리 지어 생활하는 것도 확인된 만큼 우리 생각에도 예외는 있다"고 여지를 뒀다.
동물학자들은 문어 외에 앵무새, 까마귀, 영장류 등이 인간 이후 지구를 지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는 방사능에도 견디도록 진화하는 선충이 의외의 승자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