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장인정신과 예술감각을 보여주는 뼈 필기구가 고고학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선인들이 악귀를 쫓아낸다고 믿었던 헤르마(herma 또는 herm)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은 학자는 물론 대중의 관심까지 끌었다.
이탈리아 문화유물부는 20일 공식 SNS를 통해 지중해 최대의 섬 시칠리아의 남쪽 유적에서 발굴된 첨필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지난해 말 문화부 공개로 처음 알려진 이 첨필은 약 25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유물부 관계자는 “첨필은 점토 위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고안된 단단한 침 형태의 필기구”라며 “시칠리아 남쪽 칼타니세타도에 자리한 고대 도시 젤라에서 건설공사에 따른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뜻밖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고 전했다.
이어 “첨필은 대개 뼈로 제작되는데, 이번 유물은 무른 뼈를 상당히 정교하게 깎은 것이 특징”이라며 “손잡이에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남성의 얼굴 및 중요한 부위가 정교하게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이 첨필은 그리스 문화가 널리 확산한 기원전 323년 이후, 그러니까 헬레니즘 시대의 주택가 터에서 나왔다. 항아리나 작은 조각상을 만든 장인의 작업장에 잠들어 있던 이 첨필은 약 13.2㎝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학자들은 첨필에 새겨진 남성이 그리스 신화 속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라고 추측했다. 디오니소스는 풍요를 상징하지만 이성이 마비된 도취와 창조적 광기를 관장한다. 때문에 고대인들, 특히 예술가나 장인들은 디오니소스를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독특한 영감을 주는 수호신으로 여겼다.
유물부 관계자는 “얼굴 조금 아래 손잡이 가운데에 남근이 묘사돼 있다. 얼굴 이외에 다른 신체를 새기지 않으면서 굳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독특하다”며 “이 첨필은 악귀를 쫓는 돌기둥 헤르마의 미니어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헤르마는 대리석 등을 깎아 만든 커다란 사각형 기둥이다. 위에 두상이 올라가고 그 아래에 남근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헤르마는 로마인들도 받아들여 널리 사용했다. 다만 지금까지 그리스나 로마 유적에서 헤르마를 축소해 만든 첨필이 나온 적은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근을 생명력의 상징이자 악마와 재앙을 쫓는 강력한 부적으로 여겼다. 즉 첨필은 익살스러운 발상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본인과 가정,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장인이 정성껏 조각한 신성한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유물부는 강조했다.
유물부 관계자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첨필은 책상을 장식하는 고급스러운 만년필 같은 도구”라며 “장인은 이 첨필을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물로 쓰는 한편, 예술가로서 영감이 샘솟고 건강과 행운이 따르길 기원하는 부적으로 사용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이 관계자는 “뼈라는 유기물은 원래 흙 속에서 쉽게 분해돼 이렇게 깨끗하게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장인의 작업장은 어떤 이유로 무너졌고, 그 잔해가 그대로 땅을 메우는 충전재 역할을 하면서 오랜 시간 형태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