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로 번역되는 기요틴(guillotine)은 프랑스 혁명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내리친 무시무시한 사형도구다. 고통이 적다고 해서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던 참수형을 일반 시민들에게 적용하기 위해 고안됐다. 당시 사람들은 목을 순식간에 치면 곧장 의식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기요틴은 1789년 10월 10일 프랑스의 저명한 의사이자 파리대학 해부학 교수 조제프 이그나스 기요탱(Joseph Ignace Guillotin)이 논문을 통해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보다 전인 13세기와 16세기 각각 이탈리아와 스코틀랜드에서 다른 이름의 단두대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중에 발견됐다.

기요탱은 논문에서 기계적 처형장치인 기요틴을 통해 죄인을 고통 없이 순식간에 단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1931년 영국에서 개봉한 프랑스혁명과 기요틴 관련 영화 '마담 기요틴'의 한 장면>

3년 뒤인 1792년, 프랑스 의회에서는 기요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이뤄졌다. 당시 혁명 탓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됐는데 일일이 도끼나 칼로 목을 내리치는 데 한계를 느낀 집행관들이 기요틴 도입을 적극 건의했다. 그들은 “기요틴은 사람의 수고를 덜어줄뿐더러 죄인의 고통도 줄여준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실용화된 기요틴은 기요탱이 아닌 다른 학자에 의해 설계됐으나 정작 이름은 기요탱에게서 땄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막을 연 공포정치 상황에서 기요틴은 암울한 시대의 상징이 됐다. 기요틴에 희생된 유명인사는 수없이 많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표적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창안한 과학자 라부아지에를 비롯해 혁명가이자 정치가인 조르주 당통 등 수많은 과학자, 정치가, 혁명가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포정치의 상징 기요틴 <사진=pixabay>

공포정치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와 동기였으나 정치노선에 반대해 처형된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은 당통과 함께 기요틴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기요틴은 자유의 선봉에 선 사도들을 위한 거룩한 포상이다. 내 피를 원하는 괴물들(반대파)의 명줄도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데물랭의 유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공포정치 하에서 수많은 정적을 단두대로 보낸 자코뱅당의 우두머리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28일 기요틴으로 처형됐다. 기요틴 자체를 처음 고안한 장본인 기요탱 박사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졌으나, 나중에 그가 자연사했음이 밝혀졌다.

놀라운 사실 하나. 기요틴은 혁명 뒤에도 200년 가까이 사형집행 도구로 사용됐다. 1977년까지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프랑스가 1981년 사형을 공식적으로 금지한 뒤에야 폐기됐다.

정이안 기자 anglee@sputn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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