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국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하나같이 흰 장갑을 끼는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미키 마우스부터 벅스 버니, 우디 우드페커 등 유명한 캐릭터들은 예나 지금이나 애니메이션 속에서 모두 흰 장갑을 착용하고 등장한다.
수많은 인기 만화 주인공들의 흰 장갑은 흑백 영상이 스크린을 지배하던 애니메이션 초기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제작자들은 흑백 영상에서 어떻게 캐릭터의 손을 돋보이게 할지 고민한 결과 흰 장갑을 떠올렸다.
1930년대 말 컬러 영상이 발명되기 전까지 미국 애니메이션은 오랜 시간 흑백으로 제작됐다. 컬러풀한 색상 구현이 불가능하다 보니 캐릭터의 손이 배경이나 몸과 구별하기 힘든 컷이 다수 나왔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하얀 장갑이다.

등장인물이 흰색 장갑을 착용하면서 화면상에서 손의 움직임이 두드러져 동작이나 표현이 명확하게 전달됐다. 더욱이 흰 장갑은 시인성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터의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수백 개의 프레임으로 세세한 손가락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캐릭터의 손을 상대적으로 그리기 쉬운 장갑으로 처리하면 위화감이나 어색함 없이 제작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흰 장갑은 또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연극 보드빌의 영향도 받았다. 보드빌 배우들은 과장된 동작과 화려한 의상으로 관객을 즐겁게 했다. 배우들이 낀 흰 장갑은 눈에 잘 띄어 무대 위 동작을 강조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애용됐다.

애니메이션의 여명기는 보드빌의 전성기였다. 만화 제작자들은 원래 보드빌 배우의 동작은 물론 의상 디자인에 주목하고 적잖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장갑이 배우의 움직임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애니메이터들은 대번에 알아차렸다.
의인화한 동물에 인간다움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월트 디즈니는 생전 인터뷰에서 미키 마우스 장갑이 캐릭터를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만들어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관객들은 장갑을 낀 쥐나 토끼, 돼지 등 동물 캐릭터를 인간처럼 여겼다.
요즘은 다양한 유형의 시각효과 덕분에 흰색 장갑을 끼는 실용적인 목적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오래된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흰 장갑이 상징처럼 굳어졌기 때문에 굳이 지울 이유도 없어졌다.
서지우 기자 zeewoo@sputnik.kr